가르치면서 알게 되는 것들 - 13

728x90

 

1. 봄

잠이 오는 것은 점심 시간 이후에 강의를 잡은 내 탓이다.

졸고 있는 그들은 죄가 없다.

신체활동이 왕성한 나이.

하품만 한번 해도 피로가 풀리는 나이 이지만, 눈꺼풀의 무게를 어찌 이길까.

 

2. 시험

아무리 어렵게 내어도 만점은 있고

아무리 쉽게 내어도 아니되는 점수도 있는 법이다.

내 아무리 고민해도 나를 욕할 것이다.

 

3. 전공수업

지루함은 내탓이겠지만, 전공수업이 어찌 재미가 있을까.

나도 교양수업을 강의하는 사람이었다면 

무척 재미있었을 텐데.

나. 말 잘한다.

 

4. 청춘과 어른

저항하지 않는 젊은이는 그것을 청춘이라 부르기 어렵고,

사회적 책무를 다하지 않는 이를 어른이라고 부르기도 어렵다.

 

5. 친해지기.

내 얼굴을 백년 쳐다본다 해도 친해지기 어렵다는 것을 안다.

그러니 먼저 다가와 

'안녕하세요.' 라고 먼저 말해보면 어떨까.

아니면. 3학년 지현이처럼 200미터 전방에서부터 고래고래 소리지르면서 나를 불러 보든지.

 

 

 

728x90

댓글()

가르치면서 알게 되는 것들 - 12

728x90

내가 학생들에게 늘 하는 잔소리 중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다정한 태도와 적극성이다. 

다시 말해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 같은 태도를 보이는 것을 무척이나 타박한다.

적극적이지 않아도 실패가 두려우면 그 자리에서 가만히 있는 경우가 다반사인데 그렇다면 그 인생은 머물러 있는 인생이 되겠다.

최소한의 실패마저 하지 않겠다는 자세로 삶을 살아서는 안된다.

실패는 누구에게나 두려운 일이지만 실패를 해봐야 그것이 거름이 되고 다시 일어설 수가 있다. 그리고 그 실패를 통해서 내가 감당 할 만한 실패의 임계치와 고통에 대한 체력도 길러진다. 

실패 한 번 없이 뭐든 잘되었다라는 사람을 본적도 없지만 있다 해도 신뢰할 수 없다.

돌이켜 보면 2024년도 나에겐 실패한 날들이었다.

그렇다고 주저 앉아 2025년도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다.

내 느낌에는 2025년도 몇 번의 실패가 있을 것 같다. 그렇다 하더라도 다시 하고 또 하고 계속 할 것이다.

 

얼마전 그 태도가 좋은 아이가 한 명 생각이나서 취업을 도와준 일이 있었다.

해당 회사의 팀장에게 추천을 해주었고, 운 종게도 그 아이는 지금 잘 다니고 있는 것으로 안다.

내가 추천해 준 이유는 성적이 좋거나 나에게 잘 보여서가 아니다.

하려고 하는 태도가 보였기 때문인데 물론 인격적으로 어떤지는 잘 모른다.

나의 눈이 틀렸을 수도 있겠지만, 그 정도의 태도를 가지고 있는 아이라면 얼마든지 실패를 밑거름 삼아 디디고 올라설 수 있을 것 같다. 

실패함으로써 최소한 우리는 조금이라도 하지 않았던가 말이다.어른들이 해야할 일은 아이들이 실패하지 않도록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실패하여도 괜찮다고 가르치는 일이다.

 

 

 

728x90

댓글()

가르치면서 알게 되는 것들 - 11

728x90

한 아이가 쉬는 시간에 열심히 숙제를 한다.

옆에 있는 다른 과친구에게 물어도 보지만 뭔가 찾기가 어려운 것인지 어두운 얼굴로 화면만 쳐다본다.

지나가다 스윽하고 봤는데 의료기관과 관련된 현황을 조사하고 관련 데이터에 대한 것을 서술하는 숙제인 듯 했다.

아이에게 좀 도와줄까 했더니 끄덕인다.

검색 포털을 열심히 한 흔적의 화면이 눈에 들어온다.

쉬운 세상이구나. 작은 검색 창에 알고 싶은 무언가를 넣으면 찾아주는 세상.

컴퓨터를 전공하고 그것으로 밥먹고 살고 있지만, 한번도 컴퓨터를 신뢰하거나 좋아해 본적이 없는 나는 여전히 낯설다.

나의 학생때는 인터넷이 없었으니 당연히 무언가를 알고 싶으면 학교 도서관 부터 갔다.

눅눅하고 어둑한 책 틈 사이에서 쪽지에 적어놓은 청구기호와 저자 이름을 책과 비교하면서 찾아야 했다.

두꺼운 책에서 내가 찾는 정보가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덕분에 쓸데 없는 자료도 보게 되고 의외의 정보도 알게 되는 기쁨도 누렸다.

아마도 '대구의 공공의료기관 현황' 에 대한 숙제를 낸 교수는 단번에 포털사이트에서 찾아내어 배껴 적기만 하는 것을 원치는 않았을 것이다.

초롱거리는 아이에게 나는 '공공데이터 포털'이나 '보건복지부' 의 정보공개 자료에 있을 것이니 그곳의 최신 자료를 확인하고 취합하면 되지 않을까 라고 말해주었지만 이해를 못한다.

빠른 시간에 답만 적어내면 그만인 우리 교육이 학생들을 이렇게 연습시킨 것이다.

직접 찾아내서 스프레드 시트로 만들어 보여주고는 이제 너가 해봐 했더니 그제야 내가 잡은 마우스를 낚아 채 간다.

노하우(Know-how)보다 노웨어(Know-where)가 중요해졌다고 하지만 깊은 사려 없이 쉽게 얻어진 지식이란게 무슨 소용일까 싶다.

내가 그 시절 도서관에서 바보같은 고생과 시간을 써가며 찾아낸 것들은 쉽게 잊혀 지지 않았다.

대신에 클릭 몇번으로 찾아낸 것들은 그저 소비하고 마는 활자에 불과한 경우가 훨씬 많았다.

그렇다고 예전이 좋아다거나 그것이 옳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쉽게 얻어진 것은 쉽게 망각한다.

 

728x90

댓글()

가르치면서 알게 되는 것들 - 10

728x90

내 수업을 듣는 한 아이가 '이거 드릴까요' 하면서 내 손에 벚꽃잎을 하나 놓아준다.

나는 그 아이를 잠시 쳐다 봤다. 

갑작스럽기도 했고, 예쁘기도 했다.

이런 마음이 아직 당연한 사람들을 나는 매주 본다. 

20년 넘게 아프거나, 늙었거나, 웃을 일이 없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면서 살다가

팔자에도 없는 학교에서 가르치는 일을 하다보니 웃거나, 졸거나, 정신없고 예쁜 사람들의 표정을 보게 되었다. 

덕분에 나는 조금 밝아졌다.

사람 앞에서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나는 말 잘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가르치거나(이말이 너무 싫다) 지식을 전하거나 조금씩 알려주면서도, 내 강의실의 아이들 만큼은 경쟁 시장에 몰아넣기는 싫었다.

경쟁은 사람을 멍들게 하고 다수의 아이들은 패자로 만든다. 

약육강식은 아프리카 초원에서나 통용되는 말이지 사람 사는 세상에서는 그리해서는 안된다.

그것보다는 그들이 같이 보고 듣고 생각하고 의견을 주고 받으며 세상 살아가는 방법을 깨우치길 바랄 뿐이다.

한국사회의 가장 문제는 '경쟁'과 '엘리트' 주의이다. 

이 두가지가 얼마나 사회악으로 작용하였는가는 경쟁적으로 공부를 하고 타인을 물리쳐 낸 그들, 소위 엘리트가 된 이들이 지금 어쩌고 있는지 보면 된다.

경쟁에서 이기고 높은 곳에 올라선 사람이 아닌 약자를 헤아리고 사회에서 구심점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을 '엘리트'라 정의하고 싶다.

내 시대에서 경쟁을 끝내야 마땅하다.

경쟁의 삶은 행복하지 않을 뿐만아니라, 불행과 좌절만 양산한다.

언제쯤 너희에게 경쟁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을 할 수 있을까.

 

벚꽃이 가득한 교정이라며, 수업 말고 사진 찍으러 나가자는 어떤 아이의 말에 웃게된다.

그래. 4월이지.

시간은 아껴쓰기도 해야 겠지만, 이롭게도 써야 한다.

당연한 세월에서 당연하지 않은 계절을 보낸다.

너희의 젊음이 나의 청춘이지는 않지만, 너희들 덕분에 매주 힘을 얻는다.

무심한 침묵에, 잠와요 하는 투정에, 까르르 웃는 아직은 아기일지도 모르겠는 그 모습에서.

 

728x90

댓글()

가르치면서 알게 되는 것들 - 9

728x90

학교 도서관에서 신청한 도서가 입고되었다며 메시지가 도착했다.

전공서적 같은 경우는 구매를 해서 사서 보는 편인지만, 소설이나 에세이 같은 것들은 빌려보는 편이다.

학교 도서관의 경우, 원하는 도서를 신청하면 2-3주 안에는 사다 놓고 연락을 준다.

책을 가지러 도서관에 가면 열람실에 학생이 조금 있을 뿐 책을 많이 빌려 보는 것 같지는 않는 듯 했다.

아무래도 콘텐츠가 무한정 나오는 시대에 고리타분은 종이책을 누가 읽으랴 싶기도 하지만, 아쉽기는 하다.

강의 말미에는 꼭 책을 많이 읽으라고 학생들에게 당부를 한다.

모든 인생을 다 살아볼 수 없고, 남의 경험과 이야기를 충분히 읽고 살아야 나의 인생이 풍요로워 지고 혜안이 부족해 지지 않는 다고 말이다. 

별로 듣는 것 같지는 않는다. 

책을 중요성을 알기에는 그들은 아직 젊은 것일까.

고리타분한 선생이다.

 

놀아도 도서관에서 놀았던 대학 시절이 떠올랐다.

학생 식당에서 이른 아침밥을 먹고,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다가 몇 장을 읽고 엎드려 자고 그러기를 반복했지만 그럼에도 책을 가까이 했던 것 같다. 

도서관 그 특유의 눅눅한 책 냄새도 좋았던 것 같다. (확실히 후각의 기억은 오래 남는 법이다.)

물론 내용이야 생각도 아니나고 무얼 읽었는지 기억에도 없지만 활자(text) 를 읽어내고 문맥(context)를 파악해 내는 능력은 길러내길 원했던 같다. 그리고 나쁜 글을 걸러내는 나름의 방법도 터득하긴 했던 것 같다. (나에게는 그것이 더 중요하다.)

 

천쓰홍의 '귀신의 땅' 이라는 소설과 몇 권을 책을 부탁했는데, 책을 담기 위해 가져간 가방이 풍성하다.

어떤 학생도 읽어볼 것 같지 않는 소설을 이렇게 도서관에 사다놓기를 부탁해 놓으면, 언젠가 우연히라도 읽어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여튼 나는 죽기 전에 책을 만권 쯤 읽고 싶다.

 

다음 강의 때는 너의 독서가 궁금하다라고 말해 봐야겠다.

728x90

댓글()

가르치면서 알게 되는 것들 - 8

728x90

방학기간에는 회사 일과 공부하는 것 등으로 학기 중 보다 오히려 바쁘게 지내는 편이다.

그러다가 학교에서 시간표와 관련된 문자를 받게 되면, 다음 학기의 강의자료를 한 번 펼쳐보게 된다.

그리고, 중요한 강의계획서를 작성해야 한다.

계획없이 사는 내가 계획서를 써야 한다.

물론 예전에 작성한 것들을 대부분 그대로 인용하기도 하지만, 이제는 맞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 되는 것과 수업해보니 굳이 안해도 될 것 같은 것은 과감하게 뺀다.  물론 그 공백에는 새로운 내용으로 채워 넣는다. 

 

첫 주에 무엇을 할까. 어떻게 말할까. 그것이 가장 고민이 된다. 첫 주가 어렵다.

강의 첫 날에는 대부분의 수업이 그렇듯이, 앞으로의 수업 내용과 교재, 평가 방법 등이 주로 안내가 된다.

나의 경우에는 허락되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알려주기도 한다.

허락되는 것 중에서 하나는 '수업 중에 스마트폰 사용' 이다.

내가 수업 중에 스마트폰 사용에 대해 별다른 제약을 두지 않는 이유는 볼펜 한 자루와 필기용 노트 한 권으로 강의를 듣고하던 나의 시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른들이 보기에는 그저 컨텐츠 소비와 시도때도 없는 커뮤니케이션 기계 정도로 치부될 지 몰라도, 지금의 학생들에게는 그것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기용 스마트패드를 이용한다거나, 급하게 자료 검색 스마트폰을 이용하는 것에 대한 제약을 전혀 두지 않는다. (물론 전화를 받거나, 수업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는 허용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이 가지고 있는 그 도구를 나는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설문조사나 강의평가를 한다던지, 퀴즈를 내어주기도 하고 적극적인 학생에게는 커피를 보내주기도 한다. 

그러나, 이렇게 하면 거의 절반 가까이는 당당하게 스마트폰을 올려두고 열심히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거나 심지어 영상 콘텐츠를 감상하는 일도 생긴다.

그러면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스마트폰이 당신 인생에 가져다 주지 않는 것들을 이야기 해준다.

 

1. 남의 컨텐츠를 아무리 많이 보아도 나의 지혜와 혜안 그리고 조예가 절대로. 깊어지지 않는다. (제대로 된 남의 컨텐츠는 아직까지는 책이라고 말하고 싶다.)

2. 대화는 사람과 하는 것이다. (상대방 눈을 보지 않는 카카오톡과 SNS DM이 정말 대화일까 의문이다.)

3. 텍스트가 가지는 힘보다는 사람의 목소리가 가지는 힘이 100배는 더 크다. (당신의 진심을 텍스트로 전달하기는 정말 어려운 일이다.)

4. 영상으로 길들여진 머리는 글을 읽지 못하게 하고,  독해력과 사고력을 점점 떨어뜨린다.

5. 컴퓨터의 세상이라 하더라도, 그 어떤 인간보다 우위에 있지 않다.

6. 때론 불편한 것이 정성이 되기도 한다. 컨텐츠를 친구와 공유하는 것보다 그를 초대하고, 내가 직접 만든 음식을 차려내고, 손편지를 써서 전해주는 것이 가성비가 너무 떨어진다는 생각이 든다면 여러분의 세상은 아마 점점 좁아질 것이다.

 

스마트폰이 가져다 준 온라인 세상과 타인의 콘텐츠가 학생들에게서 뺏아 가는 것을 말해준다. 물론 그 것이 장점이 없지 않겠지만,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경험하는데 정말 도움이 되는 지 의문이다.

세상을 확장하고 넓게 만들었다고 하는데, 동감하기 어렵다.

나의 세상은 백 명 정도의 사람이면 족하지 수 만명의 사람이 필요치 않다. 

 

꼰대.

나는 꼰대가 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꼰대'라는 소리를 피하려 책임까지 회피하는 입 꾹 다무는 어른이 되기는 싫다.

차라리 말해주는 꼰대가 되는 편이 낫다고 여긴다.

그리고 듣는 당신이 해야 하는 것은 정말 맞는 말일까 하는 의심과 가려서 볼 줄 아는 혜안을 가지는 일이다.

 

 

 

 

 

 

 

 

 

 

 

 

 

728x90

댓글()

가르치면서 알게 되는 것들 - 7

728x90

몇 일 동안 많은 젊은 선생님들이 죽는다는 것을 뉴스로 목격하고 있다.
왜 선생님들이고, 나이든이 아니라 젊고 꽃같은 선생님들일까.
나는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사람이지만, 가끔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니 남의 일 처럼 바라볼 수 만은 없었다.
교권 회복과 학생 보호 사이에서 결국 누군가가 생명을 잃고 있는 것이다.
 

나의 학창시절이 생각 났다.
중학교에 막 들어갔을 때였는데, 오전 수업을 하려니 어느 학생의 아버지가 교실 문을 열고 조심히 들어왔다.
시골 학교라 대부분의 부모님들은 농사일이 바빠 학교를 찾아오지도 않거니와, 수업시간에 들어올 일도 없었다.누구의 '아버지'께서는 검게 그을린 얼굴로 대뜸 선생님께 공손히 인사를 하고는 '여기 댕기는 아 아부지 되는 사람 입니더' 라는 간략한 자기 소개를 했다.자신은 무식해서 배운것도 없고, 아이를 현명하게 가르칠 능력도 없다. 그래서 아이의 모든 것을 선생님에게 맡겨둘 수 밖에 없고 집이 아닌 학교에서는 선생님이 아이의 부모 대신이니 엄하게 가르쳐 주시고 부족한 것이 있으면 그것은 모두 내 탓이니 나 또한 꾸짖어 달라며 천으로 감싼 무언가를 선생님께 전해주었다.천 안에는 그의 얼굴 만큼이나 검게 그을려 반들반들한 '오죽(烏竹) --검은 대나무' 으로 만든 회초리 두 자루였다.선생님께서는 공손하게 그것을 받아 들고는 무슨 뜻인지 잘 알겠다며 고개를 숙여 반 아이의 아버지를 배웅하였다.1년 내내 선생님께서 회초리를 드는 일은 단 한번도 없었다.그저 '오죽회초리'를 탁상 위에 두고는 수업을 하셨다.그것의 무게와 의미를 중학생 아이들이 알리도 없고, 오죽 회초리 따위가 무서워 수업을 허투루 보내는 아이가 왜 없었을까.그럼에도 최소한 선생님은 우리들을 존중해 주었고, 우리 또한 사춘기 객기를 부려 선생님께 기어 오르거나 서로를 괴롭히는 일은 없었다.1년 내내 나 또한 아버지가 회초리를 들고서 어느날 담임 선생을 찾아올까 그것이 겁났다. 
 
공포와 존경은 다른 문제다.
교권은 '공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존경'에 있는 것이고, 이것은 선생과 학생, 학부모 모두에게 해당된다.
내 아이 호되게 회초리를 질을 하더라도 '사람' 만들어 달라던 그 아버지도, 그렇다고 자신이 그 아이들 때리거나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선생님도 생각나는 지금이다. 
 
 

728x90

댓글()

가르치면서 알게 되는 것들 - 6

728x90

젊음과 청춘이라는 말은 곧 나에게 두려움의 다른 말처럼 들렸다. 그.때.는

마음처럼 되지 않던 그 청춘의 시간은 나에겐 그저 어서 지나가버렸으면 하는 계절 같은 것이었다.

중년이 되고 보니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이었는가를 알게 되었는데, 만개한 4월 교정의 꽃밭을 지나가는 그 어떤 청춘도 꽃을 보지 않더라.

더 이상 꽃이 아닌 나만 꽃을 보고 예쁘다며 감탄하고 있다는 사실에 그들은 꽃이어서 굳이 볼 필요는 없겠구나 했다.

내 청춘은 얼마나 좋았는가 싶다.

꽃밭의 꽃처럼 언제라도 젊고 예쁜 그들의 얼굴을 볼 수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안하고 초조한 시간이었지만, 불안하고 안정되지 않은 상태가 청춘이었던 것 같다.

 

맨 앞에 앉아서 졸거나 가끔 초롱한 눈빛으로 강의를 듣던 학생 둘에게 건너편 공대 구내 식당의 짜장면이 맛있으니 한번 가 보길 권했는데, 그 말을 기억한 것인지 다음 수업 때는 나에게 쪼르르 달려와서 "교수님 갔다 왔어요 거기. 공대 짜장면" 하며 웃는다.

꽃 같았던 청춘이었다 하더라도 다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불안해서도 아니고, 현재의 내가 만족스러워서도 아니다.

누구나 현재 보다는 지나고 나서야 아름다워 보이는 것이 청춘이다.

나를 바라보는 아이들은 현재의 청춘이 고통이 있다 하더라도 부디 그 시간들이 아름다웠으면 좋겠다.

닳고 낡아빠진 어른들 틈으로 기어들어가지 말았으면 좋겠고. 어리석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으면 좋겠다.

지나고 나서야 청춘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728x90

댓글()

가르치면서 알게 되는 것들 - 5

728x90

나도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서 배우고 알게 되고 성장했다.

저 혼자 잘나서 홀로 잘 되는 법은 없다.

티가 나든 그렇지 않든 그 누군가의 도움과 내 서툰 시간들을 기다려 주며 인내한 사람이 반드시 있었을 것이다.

그 언젠가 나도 그 누군가에 대한 고마움을 되갚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특정할 수 도 없는 수많은 '그 누군가' 를 다 찾을 수는 없으니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래서 선택하게 된 것이 가르치는 일을 하기로 한 것이다.

가르친다는 것은 신념과 체력 그리고 책임감을 가져야 하는 일이다.

처음에는 그런 것들이 나에게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면서 주저했던 것도 사실이다.

나보다 조금 덜 알고 있는 사람에게 그나마 알고 있는 것들을 나누어 주는 것이, 내가 당연하게 받아왔던 수많은 시간과 인내에 대한 채무를 조금이나마 갚는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은 가르치면서 배우는 것이 더 많다.

누군가의 선생이 되어보면,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의 깊이가 얼마나 얕고 보잘것 없는 것인지를 알게 된다.

머릿속에 있는 것과 그것을 말로 타인에게 전달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며, 더욱이 어렵지 않게 설명해야 하는 것은 더 어렵다.

베테랑 직장인에서 서툰 선생이 되는 과정은 그런 것들을 다시 익히고 공부하는 과정이었다.

어른이 가져야 하는 사회적 책무에 대한 빚갚음으로 시작했던 일이 오히려 나를 다시 배우게 한 것이다.

또 하나의 빚이 생기게 된 것이다.

 

사족.

나는 더 잘 설명하는 사람보다는 더 잘 헤아려 주는 사람이 되었음 한다.

 

728x90

댓글()

가르치면서 알게 되는 것들 - 4

728x90

이번 학기도 어김없이 마지막 강의 시간이 오고야 말았다.

정리하고자 하는 말을 입으로 내놓으니, 얼른 학교를 벗어나고자 하는 학생들은 책을 덮고, 각자의 가방을 싸기 바빴다.

'이제 나 못 볼 수도 있는데??


라고 말하니 모든 학생들이 잠시 동작을 멈춘다.

그런 모습을 보고 나는 그만 웃고야 말았다.

자네들이 3학년이 되면 나는 3학년은 가르치 않으니 수업 때 보지 못할테다. 그러니 가끔이라도 학교에서 마주친다면 인사를 하고 지내자 하였다.

 

지금의 2학년들은 역병이 창궐하는 시절에 성년이 되어 학교를 왔고, 무심히도 2년이 지나버린, 어쩌면 운도 지지리 없었던 아이들이다.

그것이 내 잘못은 아니겠지만, 어른으로써의 미안함으로, 정성으로 모자람이 없이 가르치고 전하기 위해 애썼다.

그들에겐 내가 어떤 선생이었는지 모르겠으나, 가급적이면 지식도, 지혜도, 살아가는 방식도 알려주고자 하였다.

나는 그들이 바르게 살길 원한다.

조금 모자르고 서툴다 하더라도, 그 방법과 마음이, 태도가 바르길 원한다.

다른 아이들은 어쩌지 못한다 하더라도, 최소한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은 그랬으면 한다.

내 수업시간 내내 졸기만 하던 학생도, 내 얼굴보다 스마트폰을 많이 보던 학생도, 취업과 진로 고민으로 용기있게 상담을 걸어오던 학생도, 좋아하는 초콜렛이라며 멋쩍게 건네 주던 학생도 모두에게 고맙다.

아직도 배워야 하는 나에게는 순간 순간 너희가 선생이었다.

 

 

사족이지만, 나는 그들에게 선생과 강사 그 어느 언저리 쯤이면 좋겠다.

 

 

 

728x90

댓글()

가르치면서 알게 되는 것들 - 3

728x90

1. 한 학기동안 나는 학생들과 시험 주간을 빼면 39시간을 붙어 있는다.
2. 시험 문제는 쉽게 내는 것이 어렵게 내는 것보다 어렵다.
3. 과제는 대부분의 학생들이 싫어한다. 그런데도 과제 있냐고 묻는다.
4. 오늘 강의자료 올려주느냐고 매 시간 묻지만, 올려준 자료를 읽는 학생은 절반도 안된다.
5. 그들이 수업 시간에 조는 이유는 강의가 아침 일찍이어서가 아니라 내 탓이다.
6. 전공과목인데 결석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F면 어쩌피 재수강해야하는데도..)
7. 맨 앞에 앉아서 강의를 듣는다고 열심히 듣는 것은 아니다.
8. 학식은 맛없고 비싸다.
9. 학교에서 보이는 교수가 모두 불쌍하게 보인다.
10. 학교에서 만나는 학과장 교수가 가장 불쌍하게 보인다.

728x90

댓글()

가르치면서 알게 되는 것들 - 2

728x90

그들은 꽃들이어서 굳이 꽃을 보지 않는다.

꽃들이 잔뜩 피어난 길을 지나다 보면 도서관이 있다.

학생들은 생각보다 도서관을 이용하지 않는다

찬란한 꽃 같은 시절의 혈기 왕성한 호르몬들이 음습하고 책 냄새나는 곳에 앉아서 시간을 보내는 것을 좋아할리는 없을 것이다.

여튼 나같이 선비같은 사람들은 공짜로 얼마든 좋아하는 책을 볼 수 있고, 또 요즘은 주문해두면 책도 가져다 둔다.

이 모든 것은 수업료를 낸 학생들이 누려할 권리인데, 대신 내가 누린다.

도서 대출증에 볼펜으로 책 제목을 적어가며 책을 빌리던 세대였는데, 요즘 학교 도서관은 당연히 모바일 출입증으로 바코드를 찍고 입장하며 도서 대출이 가능하다.

학교를 떠나니 책이 좋아지는 것 처럼, 아는 것이 많아 지니 읽는 것이 즐거워 진다. 

수업 시간 종종 책을 권하기도 하고 실제로 빌려서 보여주기도 하지만, 관심은 없다.

나도 그랬으니까. 꽃 같은 시절에는

너희 선생보다 책이 더 좋은 선생일텐데 아쉽기만 하다.


중간고사가 끝나면 중간평가 라는 것을 받게 된다.

교수가 학생들을 시험을 통해서 평가하는 것이라면, 교수도 학생들로부터 일종의 평가의 받는 것이다.

평가는 내 강의를 듣는 학생들로 부터 받는데, 학생들이 중간평가를 하지 않으면 자신의 성적을 확인하지 못하도록 되어있다.

평가항목은 객관적 평가항목과 서술형식의 주관적 평가항목으로 나뉘는데 익명이라고 하지만 서술형으로 써놓은 글의 태도만 보아도 누구인지 대충 짐작이 되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다.

나는 겸임교수라 평가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진 않겠지만, 전임교원이나 강의만 하시는 강사님들은 그렇지 않겠다는 생각도 든다.

어찌되었든 서로가 평가하는 시대이다. 좋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평가를 좋아하는 나라니까.

내가 낸 시험지를 받아들고 낮은 한숨과 시험지 넣어가는 소리, 남은 시간을 보는 시선들을 아직 기억한다.

그들은 한 평생 누군가의 시험에 들지도 모르겠다. 나 또한 얼마전 답답한 가슴으로 시험장에 들어가 검증시험 같은 걸 본적이 있는데, 시험은 언제나 싫은 것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시험 문제를 내고 평가를 할 만한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이 나에게 부여한 자격을 충실하게 수행하고자 한다.

나도 학생들도 누군가의 시험에 좌절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728x90

댓글()

가르치면서 알게 되는 것들 - 1

728x90

일주일에 한 번 지방의 작은 전문대에 출강을 나간다.

어느 날 어쩌다 보니 가르치는 일도 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IMF 시절 영향으로 어렵게 취업이 된 시기에 학교를 나왔으며, 어쩌다가 병원에 들어가고 또 어쩌다가 컴퓨터로 밥을 벌어 먹고 살았다. 

운 좋게도 큰 무리없이 20년 가까이 실무를 하면서 많은 것을 배우고 담았다.

 

내가 가르치는 학생은 2학년이다.

2학년이 사실 좋긴 하다.  1학년 처럼 막 스무살이 되어서 그냥 몸만 큰 아이도 아니고, 취업을 앞둔 불안하기 짝이 없거나, 취업하고 난 다음 설렁설렁 학교를 다니는 3학년이 아니니까 말이다.

물론 스물한살의 몸만 큰 아이는 스무살과 별반 다르지는 않다.

너희는 아직 성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모든 것을 제약 당하다가, 몇 일 더 살았다고 너희는 오늘부터 성인이니까 세상 모든 건 알아서 해야 하며 그에 따른 책임도 너희가 져야 한다며 매몰차게 사회에 던져진다.

예전처럼 고루한 선배들과 동아리 활동을 한다거나 학과사무실에 죽치고 앉아서 세상 사는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내며 대학을 나온 사람이면 모를까, 지금의 이들은 크고 작은 성추행 혹은 갑질이나 일삼는 본인보다 학교 더 다닌 사람이 있을 뿐, 필요한 조언이나 개고생을 벗어나게 해줄 길잡이나 선생은 없는 것이다.

 

그들에게 가르치는 과목은 정부가 정해놓은 가이드라인에 근거하여 규정과 원칙대로 가르친다.

어딘가에 써먹기 위한 기술이나, 소위 자격증 같은 것을 잘 따낼 수 있는 쪽집게 강사처럼 지식을 전달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내가 익히고 경험한 것들을 정말 그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을 가르쳐야 하는 것인지 선택하기는 어렵다.

강의를 수락하고 지금까지도 고민하게 만드는 것 중 하나이다.

모든 것이 그렇겠지만, 모든 학생들을 만족시킬 수도 없고 그만한 자질도 나에겐 없다.

그저 적당한 비용으로 나의 실무지식을 학생들에게 전달해주길 바라는 학교와 정부가 있을 뿐 인지도 모르겠다. (취업까지 시켜주면 좋고..)

가르치는 일은 일종의 사회적 책무이다. (돈이 안된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사회적 책무라는 것은 사실 문안하게 살아온 나에 비해 엄혹한 시절을 보내고 있는 젊고 예쁘고 불안한 그들에게 어른으로써 미안해서였다. 

내가 아는 조악한 지식일지라도 나누어 주고 싶었다. 그렇게 한다고 사회적 책무를 다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덜 미안하기 때문이다.

나도 아직 제대로 된 어른이라고는 할 수 없겠으나, 더 살고 더 배웠으니 나눠주는 것은 마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못난 선생일지라도 많은 것을 배워냈으면 좋겠다. 서로에게.

 

인생은 폭풍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빗속에서 춤추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 밀란쿤테라

 

 

 

728x9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