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차를 마시는 이유
입대 일자를 일주일 남겨 둔 어느날, 나는 아직은 싸늘한 초봄의 낯선 마을에 버스를 타고 아무때나 서는대로 내렸다.
그저 풍경이 예쁘고 조금 걷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스물 한살 때였다.
길가에는 초라하지만, 정겹게 쓴 글씨로 '다천산방'이라고 적혀있는 곳을 따라 걸어들어 갔는데, 이름 처럼 커다란 나무와 주변이 산으로 둘러져 있는 작은 찻집 이었다.
까까머리를 하고 조심스럽게 계세요 라고 운을 떼니 인상 좋으신 아주머니가 나와서 나를 맞이햇고, 차를 알리 없는 촌놈에게 오늘은 오룡차가 좋겠다며 나에게 권했다.
그렇게 나는 그곳에 정을 붙이고 틈만 나면 들러서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좋기만 한 차를 여즉 마시고 있다.
주중에 오랜만에 찻집에 들어서니 여전한 미소로 나를 맞아 주는 찻집 주인이 있다.
푸근한 인상의 아주머니는 어느 듯 머리가 허옇게 되었지만, 새삼 나를 반기지도 그렇다고 외면하지도 않는다.
찻물을 올리면서 대뜸 내 나이를 묻는다.
"제 나이도 모르셨어요?", "그냥 갑자기 궁금하네"
내 나이를 듣고는 놀라면서 "나만 나이를 먹는줄 알았더니 자네도 나이가 드는 구나." 라고 하신다.
홍석씨 청춘이 내 청춘이었던 같애.
금새 지나가버렸지만, 싫지도 아쉽지도 않은 그럼에도 좋았던 날들이어서.
여전히 들러줘서 고맙고 예쁘게 나이들어서 다행이야.
여전한 공간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몇 달만에도 없어지는 공간이 당연한 요즘에 까까머리 군인이 중년이 될 때까지 기다려 주는 공간이 나에게 있다는 사실이 새삼 고마워졌다.
고단한 군 생활 틈에 간만의 휴가 때에도, 취업과 학점 걱정을 하던 학부 시절에도, 수줍게 연애하며 데리고 왔었던 그 어떤 인연과 대화를 나눌 때에도, 이렇게 나이가 점점 들어가며 계절을 눈여겨 볼 때에도 여전히 나는 이곳을 찾아 차를 마셨다.
고마워요. 여전히 차를 내어주셔서.
부디 오래오래 사라지지 말고
오늘은 무슨 차 내어 줄까 그렇게 물어봐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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